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단고기/고증적 비판 (문단 편집) == 전체적 내용 == 아주 먼 옛날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있었고 이들이 아이사비(阿耳斯庀)에서 만나 [[천신]]의 가르침을 받고 결혼했는데 한민족이 바로 이들의 후손이다. 그리고 {{{#teal 한민족은 기원전 7197년 혹은 기원전 6만 7079년에 세계 최초의 문명국가 [[환국(환단고기)|환국(桓國)]]을 세웠고, 그 군주를 [[환인]]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환인은 모두 7명이 3301년 혹은 6만 3182년 동안 다스렸는데, 일반적으로 초대 환인은 안파견(安巴堅) 이라고 하나 환국 말기에 [[환웅]]에게 태백산을 점지해주는 존재도 안파견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고유명사는 아닌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거발환(居發桓)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이 나라의 중심지는 흑수와 백산이라고도 하고 천산이나 천해라고도 하는데 그 영역은 자그마치 {{{#teal 남북이 5만 리에 동서가 2만 리였다.}}} 환국은 비리국·양운국·구막한국·구다천국·일군국·우루국·객현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사납아국·선비이국·[[수밀이|수밀이국]]의 12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원전 3898년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동방으로 가 배달(倍達)을 세웠는데, 도읍은 당시 태백산이라 불리었던 현재의 [[백두산]]의 신시(神市)이고 그 군주는 [[환웅]]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그 유명한 [[단군신화]]의 천강신화 그리고 [[웅녀]] 이야기의 주인공인 초대 환웅은 거발환(居發桓)이라고 하나, 이 또한 고유명사는 아닌 듯. 모두 18대 환웅이 1565년 동안 다스렸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 중국과의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환웅과 나란히 환국에서 갈라져 나온 [[반고]]가 돈황 인근 삼위산(三危山)에 자리를 잡았고, 5대 태우의 환웅의 아들인 [[복희(중국 신화)|복희]]가 지금의 중국으로 이주하여 토착민인 수인씨와 유소씨를 밀어내고 일대 세력을 이루었으며, 그 뒤에는 역시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온 소전씨의 아들 [[신농]]이 중국의 우두머리가 되어 공상(空桑)을 경계로 배달국과의 국경을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전씨의 다른 후손이 바로 [[황제(중국 신화)|헌원]]이다. 이러한 중국과 [[배달국]]의 갈등이 터져나온 것이 바로 14대 환웅인 자오지 환웅 시기다. 비교적 인지도가 높은 [[치우천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teal 치우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자오지 환웅은 당시 기준으로 엄청나게 혁신적이었던 쇠(금속)으로 만든 갑옷과 무기를 병사들에게 장착시켰고,[* 중국 신화에서는 치우에 대해 구리 머리에 쇠 이마(銅頭鐵額)라고 묘사한다.] 그 뒤 신농씨의 후손 [[유망]]을 때려잡고, 연전연승하면서 [[황제(중국 신화)|황제]], [[공손헌원]]을 공격했다 한다.}}} 이로써 유망은 쫓아내고 헌원에게는 항복을 받았으며, 여기에 더해 황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전욱과 고신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중국으로 널리 영토를 개척한 결과 {{{#teal 하북성과 산동성과 강소성과 하남성 지방을 전부 차지하고 도읍을 중국 땅으로 옮기기까지 했던 이 시절이 바로 배달국의 황금시대였다. 이것을 '''청구배달(靑丘倍達)'''이라고 한다.}}} 그러다 이번에는 마지막 환웅과 웅씨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불함산 아래에서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왕검의 지휘 아래 천하가 평정되고 조선이 세워졌는데, 도읍은 만주의 [[아사달]]이고 그 군주는 [[단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모두 47명의 단군이 2095년 동안 다스렸으며 영토를 [[삼조선|진한(辰韓)·마한(馬韓)·번한(番韓)]]으로 갈라서 진한은 단군의 직할령이 되고 한반도에 해당하는 마한에는 웅씨의 후손이, 중국 방면에 해당하는 번한에는 치우의 후손이 대대손손 다스리도록 했다. 이번에도 역시 중국이 문제라, 단군 왕검은 요(堯)와의 전쟁이 이어지자 순(舜)을 지원해 주어서 요를 굴복시키고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선의 치수 기술을 중국에 전수해주었다. 또한 순과 국경을 정해서 하북성을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고 강소성에는 자치정부를 두어서 순에게 감독을 맡겼는데, 왕검의 뒤를 이어 즉위한 부루는 순이 하북성을 정복하려 하다 화를 입기도 했다고 한다. 단군 부루의 뒤를 이은 {{{#teal 3대 단군 가륵은 기존의 문자 대신 독자적으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는데 훗날 한글의 모태가 되었다.}}} [[흉노]], [[몽골]], [[선비]] 등 여러 북방민족들도 바로 이 즈음에 한민족으로부터 갈라져 나간 지파들이다. 기원전 1767년에 [[은나라]]가 [[하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는 단군이 슬쩍 군사를 출동시켜 중간에 공격하자 은나라의 탕왕(湯王)이 놀라서 얼른 군대를 물려 단군에게 사죄하기도 했고, 이에 단군이 하나라로 출동시켰던 군사를 빼려고 하는데 여기에 하나라가 이를 막자 단군은 거꾸로 은나라를 도와서 하나라를 멸망시켰다. 다시 인구가 1억 8천만 명을 찍는 등 한창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조선은, 21대 소태 단군에 들어서 개사원의 고등과 그 아들 색불루의 세력이 강성해져 이웃나라들을 침략하고 급기야 단군을 자칭하기에 이르자 스스로 단군위를 버리고 은거해버렸다고 한다. 이로써 22대 단군으로 즉위한 색불루는 백악산으로 천도하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는 등 국체 개조 사업에 들어갔으나, 변방에서 신독의 난이 일어나 영고탑으로 몽진하던 중 [[객사#s-2|객사]]하였고, 그 아들 아홀이 단군위를 이어받아서 가까스로 백악산으로 환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부사정과 관계없이 조선은 그 뒤로도 산동과 하북을 차지하고, 은나라를 공격해 강소성을 점령하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를 평정하는 등 위엄을 떨쳤다. 그런데 즉위와 붕어가 전부인 37대 마물 단군부터 42대 을우지 단군까지 18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이를 기점으로 조선은 '''급속도로 국세가 기울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43대 물리 단군 재위 36년에 벌어진 우화충의 난인데, 우화충이라는 사냥꾼이 무리 수만 명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깨져나갔던 것이다. 반란군이 도성을 포위하자 단군은 배를 타고 송화강을 따라 몽진하던 중 객사하였고,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영웅으로 떠오른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44대 단군으로 추대되었다. 구물은 국호를 대부여로,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고 삼조선의 군권을 분할하였다. 이후 45대 여루 단군 시절 조선은 서쪽으로 연(燕)·제(齊)와 공방을 거듭하다가 결국 상곡을 국경으로 화친을 맺었다. 하지만 {{{#teal 번조선왕이 연나라의 자객에게 살해되고 기후(箕詡)라는 사람이 46대 보을 단군의 허락을 받아 왕위에 오르면서 번조선은 [[기자조선]]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이런 와중에 기원전 296년 진조선에서 한개(韓介)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46대 보을 단군이 몽진했다가 환도한 직후 사망하였고, 이번에도 한개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영웅으로 떠오른 장군 고열가가 47대 단군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고열가는 나라의 국력이 쇠진하고 고구려 사람 [[해모수]]가 기자조선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우외환에 처하자, 기원전 238년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은거하는 것으로 조선을 해체시켰다. 이후 진조선은 오가(五加)가 함께 공화정치를 펴다가 6년만에 해모수에게 정권을 이양하여 [[북부여]]로 전환되었고, {{{#teal 한편 기자조선은 중국에서 망명해 온 위만이 기준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면서 [[위만조선]]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자연스럽게 북부여는 이렇게 생긴 위만조선과 거듭 갈등했지만,[* 기원전 118년 북부여는 위만조선의 침공군에 대패해서 해성 이북 50리 땅을 상실했다가 3년 뒤에 고우루 단군이 직접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빼앗긴 땅을 탈환한다.] 결국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가 뒤이어 북부여로 쳐들어오자 위만조선에 살던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 고열가의 후손이라는 말은 일설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열가(高列加)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에는 애당초 노리고 지은 이름인 듯.]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눈부신 활약으로 [[한나라]]를 몰아낸 뒤 4대 고우루 단군에게 당장 [[반역|물러나라고 요구했고]], 이러한 고두막한의 기세에 대응한 고우루 단군은 병사, 뒤이어 즉위한 해모수의 증손 해부루는 군대를 동원한 고두막한의 위협에 순순히 수도를 바치고 가섭원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졸본부여는 북부여, 가섭원부여는 동부여가 되었다. 이후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는 동부여로부터 도망쳐 온 해모수의 다른 증손자인 [[고주몽]]을 받아들여 사위로 삼고 왕국의 후계자로 지정했으니,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시작이다. 이후 환단고기에서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단일 기록인 데다 고구려왕을 열제(烈帝)로 호칭하거나, [[을파소]]가 '''[[조의선인]]'''을 조직하였고 [[을밀]]과 [[연개소문]]이 조의선인 출신이거나, 고구려와 백제가 요서와 중국의 동부 해안을 돌아가며 장악 하는 정도인데, 이렇다 보니 심지어 백제와 신라에 대한 것도 별도의 체제 없이 고구려본기로 끌어다가 서술하고 있다. 그래도 역시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건 7세기 [[고구려-수 전쟁|중국과의]] [[고구려-당 전쟁|대전쟁]]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1차 고구려-당 전쟁의 승리까지만 서술되어있다.[* 추가로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에서 단순히 수나라군을 털어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수나라를 침공해 태원과 유주를 점령하고, [[안시성 전투]]에서도 [[당나라]]를 역침공해서 당의 수도 장안에 입성하면서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를 모조리 점령한다.] 그 뒤로 이어지는 [[발해|대진국]]본기, 고려본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국제정세가 비교적 안정된 시대다 보니 그다지 중요한 기록은 없었다. 다만 특징적으로 일본에 대한 서술이 조금씩 기록되어있다. 고려본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궁예]]를 [[안승]]의 먼 후손이라고 전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